2026 EXHIBITION
2026 EXHIBITION
바람 속을 ( ) 걷는 사람들
As We Walk Through the Wind
기간
2026. 03. 18.(수) - 04. 04.(토) 10:00~18:00
장소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글라스폴리곤, 베이스폴리곤
기획 및 서문
주수빈
작가
김수민, 김유나, 김진선, 노은영, 박초연, 박희민, 이지숙, 전효인, 주수빈, 최청조
Prelude : 바람 앞에서
멀지 않은 옛날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꿈꾸는 나라들도 있었다
햇빛이 많은 것을 삼키던 시대였는데
영원할 것 같던 해가 지고서
지구의 시간이 흐른다
거짓말처럼
잔잔한 바람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은 불현듯 알아차리게 된다
바람이 멎었네.
문득 불길했는데
불길한 기척은 지구의 정수리에서부터 목격되기 시작한다
땅이 한 조각 두 조각 고요히 녹아가고
징후는 아래로 뻗어나간다
지구의 목에서 가슴으로
팔에서 배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눈이 멀어 가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빛에 삼켜지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가는데
보지 못했다 홍채는 진작에 타버려서
슬며시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른 해가
다시 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는데
햇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모두 죽어버려.
그때
붉은 열매를 가진 나무가
해를 가리며 조용히 속삭인다
바람을 따라가.
때아닌 일식 속
그 음성이 들려왔을 때
사라졌던 바람이 사람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
그리하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람 속을 걷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온다.
머리칼을 흔들어오는 존재를 느끼며,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당신도 그 속에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아리아드네의 실’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미로로 들어가야 했을 때, 문제는 괴물이 아니라 미로였다. 한 번 들어가면 도로 나올 수 없는 미로에서 사랑하는 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쥐여 주고, 실이 미로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과 테세우스를 이어준 덕에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된다.
이 신화를 현실로 확장시켜, 만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미로라고 했을 때, 혼란 속에서 우리의 사유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완전한 해답은 없더라도 내가 나를, 내가 세계를 등져버리지 않도록 되돌아가거나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알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 만일 지구에 중력이 없어 우리의 몸이 이 땅에, 그리고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살아갈 수 없듯이 말이다.
‘우주가 팽창하고 모든 것은 서로 멀어지고 있다.’
이 광막한 문장을 추상적으로 좋아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큰 후 알게 된 사실은, 중력으로 강하게 묶여있는 것들에게는, 이를테면 이 지구 안에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불가항력적인 멀어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하와 은하 사이의 어둠의 공간이 늘어나는 것일 뿐, 살아 숨 쉬고 빛나는 존재들 사이에는 중력이 작용한다. 그것은 멀어짐을 택하지 않는 이상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단단히 연결되어 언제까지나 서로의 곁에 머물러줄 수도 있다. 그 신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수상 소감문을 수록하여 출간한 <빛과 실>이라는 저서에서 술했듯, 세계는 바람과 해류를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부는 바람은 이곳으로도 불어온다. 광주천을 흐르는 물은 서울의 한강을 흐르는 물과도 느슨하게 이어진다. 지구 각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아침은 모두 다르고, 기술이 발전하며 인류는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시간 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 더더욱 파편화되고 분절된 시간을 살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맞닿아 있다.
겨울은 입김이 눈에 보이는 계절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 안에 부는 바람이 보이는 것이다. 이 전시가 열리는 봄에 바람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연결의 바람을 표현할 수 있을지를 잠시 생각하다, 나무도 호흡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무가 내뱉은 산소를 우리는 들이마신다. 그 나무의 몸속 어딘가에는 과거 이곳을 거닐던 이가 내뱉은 숨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전시장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호랑가시나무와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들에 대한 다정한 믿음을 가지고서, 겨우내 준비한 바람을 이 자리에 선보인다.
전시가 열리는 세 공간—아트폴리곤, 글라스폴리곤, 베이스폴리곤—은 불과 물과 흙과 바람이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4원소에서 모티프를 얻어 서로 연결되었다. 미궁을 빠져나가려면 길을 걸어야 한다. 저물지 않고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흙과 물로 건설한 몸들이 이곳에 바람길을 만든다. 통로는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곳, 그 길에 놓인 바람이 드나드는 몸들을, 지금부터 따라 걸어가 보자.
The Journey : 바람 속에서
제 1막 : 아트폴리곤에서
하얀 아침. 걷는 사람들. 바람 속에서 어렴풋이 바다가 들린다.
최청조의 ( ) : 연결의 소리
최청조가 만드는 옹기에는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의 소리가 담긴다. 흙으로 빚어진 그 몸에는 늘 자그마한 바람 구멍이 나 있는데, 겹오가리 형태를 띤 이번 신작 <연결의 흔적, 허음>의 소리를 모으는 볼(Bowl) 속에는 소리의 파장을 증폭시키는 소금물이 찰랑대고 있다. 소금의 탄생이 바닷물과 바람이 관여하는 일이듯, 옹기의 몸을 두 팔로 껴안고서 바람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소라 고동에 귀를 가져다 댔을 때와 같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있다. 우리가 호흡을 하듯 숨 쉬는 그릇인 이 옹기의 몸 속에 부는 바람 소리이다.
당신은 이곳의 모든 공간에 놓인, 바람과 공명하는 이 작은 몸들이 이끄는 바람의 길을 걸어간다. 대륙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연결하는 해류와 바람이 이곳으로 불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김수민의 ( ) : 연결의 방법
붉은 열매를 가진 나무의 음성을 듣고서 우리는 바람 속을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면 바로 그 나무가 여전히 당신이 가는 길을 바라보며 서 있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린 곳에는 그 존재가 멸종해 버리지 않고 지난 400여 년간 생존해 올 수 있었던 비책이, 바람을 따라가 보라던 수수께끼 같은 말의 뜻이 숨겨져 있다.
인간이 부여한 기능과 역할에서 벗어난 재료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 구조처럼 존재할 수 있는 상태에 대한 상상 하에, 산업적인 인공 재료들로 구성되었으나 살아있는 자연의 담쟁이 넝쿨과 연결되어 공간에 수평적으로 드리워진 이 호랑가시나무의 거대한 돌연변이는 호랑가시나무의 생태적 특징과 생존 방식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변화하는 동시대의 물질 환경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어 나가는 공생적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무언가와의 맞닥뜨림을 동력 삼아 유연하게 접히고 열리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바람과 같이, 김수민의 작업은 재료와의 맞닥뜨림에서 시작된다. 김수민은 재료를 다루면서 발생하는 우연을 따라가며 그 변화와 흐름 속에서 형태가 생성되는 과정을 작업으로 이어간다. 이러한 방식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생존을 확장해 온 호랑가시나무의 생태와도 맞닿아 있다. 호랑가시나무의 밑둥에 돋아있는 가시는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자신의 열매를 먹이기 위해 무뎌졌고, 그 열매를 먹은 새들은 배설을 통해 호랑가시나무의 종자를 퍼트려왔다. 이 공간의 벽으로부터, 비아(非我)의 몸으로부터 연장된 몸처럼 존재하는 부조의 <House>라는 제목은 그러한 맥락에서 붙여진 것이며, 바닥에 놓인 조각 <영원하지 못할 영원> 또한 호랑가시나무의 생존 방법을 빌린 인간 신체에 대한 상상으로 빚어진 것으로, 세계를 향해 열린 미완의 상태로 생동하고 있다.
이어서 조금 더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면 천장의 통창을 향해 뻗어있는 또 다른 나무가 있다. 그와 유사한 보호색을 띠고서 그 곁에 또 하나의 돌연변이처럼 늘어져 있는 <매듭진 피부(1)>은 인간의 피부를 은유한 살구색 천과 동물의 피부인 털을 접착제로 고정하는 대신 부드럽게 매듭 짓는 방식으로 이음으로써, 세 존재자를 느슨하게 연결한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는 그들이 닮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은영의 ( ) : 연결의 의미
바람 속을 거닐다 보니 숲속이다. 당신은 하나의 몸이 또 하나의 몸에게 기대어 있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매일 오르던 뒷산에서, 어느 날 노은영은 칡넝쿨에 뒤덮여 죽어가며 점점 사람의 형상을 닮아가는 큰 나무와 그 나무를 지탱해 주고 있는 작은 나무의 모습을 목격한다. <스러지는 몸>과 맞닿아 있는 주변의 몸들이 그 사死를 딛고 생生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그 모습을 묽고 엷게 개운 물감을 반복해서 쌓아 오랜 시간 동안 그려내며 자연과 인간 세계의 변증법적인 순환과 공생 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나아가 서로 다른 지역—미국과 동남아시아—에 연원을 두었으나 자연 속에서는 위계 없이 공존하는 존재들인 두 까마귀가 등장하는 <믿음의 동력>에서 작가가 던지는 물음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그는 인간의 믿음은 그러한 자연의 수평적 질서와 달리 자주 배타적으로 작동하나 그 배타성이 생존과 진화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하며, 인간만이 가진 믿음이라는 것을 추동하는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한다.
“연대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품고 같은 풍경 앞에 서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노은영과, 지금 여기에서 그가 던진 물음들에 대해 생각하며 그가 보았던 것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당신의 사이에, 바람이 불고 있다.
김유나의 ( ) : 연결의 구조
숲에서 빠져나온 당신은 갑작스레 눈과 입에 그늘이 드리워진 하얀 얼굴들을 맞닥뜨린다.
이 얼굴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표정이라기보다는, 보거나 말하는 일이 이미 어떤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에 가깝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김유나는 우리가 맺고 있는 연결의 방식과 그 연결이 작동하는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의 여로를 입체화한다. 그 앞에 멈춰 선 당신은 지금 부는 이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 것인지, 얼마간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말은 아니고>를 통해 작가는 구조 속에서 인식과 발화가 이미 제한된 상태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자유로운 감상의 장소처럼 보이는 미술관도 실은 강한 규칙과 암묵적 금기에 기반하여 유지되듯, 사회 구조 하에서 우리는 원하는 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인식하며,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정해진 언어와 틀 안에서 발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작가는, 결국 이러한 구조란 영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방식과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지닌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곳 아트폴리곤과 이어져 있는 글라스폴리곤 공간의, 수직적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검은 계단 앞에서 당신이 취하게 될 입장과 맞닿아 있다. 계단은 본래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이어주는 사물이나 그것의 역할은 그곳에서 당신이 마주하게 될 특수한 상황에 의해 저지된다.
한 공간에서 우리가 어떤 연결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는, 다음 공간에서 그러한 연결이 ‘언제’ 조건이 되고 ‘언제’ 선택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이렇듯 시제가 들어온다면 모든 것은 해석과 행위에 달려있게 되므로, 그 물음 앞에서 다음 공간으로 향하는 당신의 움직임 역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어쩌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또 다른 연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2막 : 글라스폴리곤에서
노란 한낮. 사람들은 여전히 바람 속을 걷고 또 걷고 있다.
김진선의 ( ) : 연결의 색
당신은 이제 외부와 내부의 가름이 모호해지는 신비의 굴로 살며시 들어간다. 하얀 빛과 녹빛 풀, 감색 나무와 검은 돌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며 안과 밖의 경계를 진동시키고 있는 다채로운 덩어리가 단단한 기둥에 나른히 기대어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실과 지퍼로 작업하는 이유는 구조를 만들다가도 다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하는 김진선의 <열고 닫는 조각 3>는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미결정의 ‘상태’에게, 이름하기도 어려운 가능성의 지대에게 몸을 주려는 시도이다. 어쩌면 그 몸은 생각 외로 제법 거대해질 수도 있다.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의 사이-공간에서는, 선명함이란 것이 흐릿함보다 언제나 힘이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이 조각의 몸체를 구성하는, 천과 지퍼가 결합된 모듈 색의 변주에서도 드러난다. 실제 삶 속에서 ‘우리’의 모양도, 다름으로 시작했음에도 어느 사이 서로를 닮아 있기도 하듯, 처음에는 모든 천과 지퍼의 자리가 서로 팽팽히 대비되는 보색 관계에 의해 정해지나, 모듈과 모듈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순간 유사색들이 맞닿을 수밖에 없게 되며 한 존재와 다른 존재의 사이를 가르던 경계의 흐트러짐이, 느슨한 연속성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나아가 당신은 직접 지퍼를 열고 닫음으로써 그것의 내부를 활짝 열어 들여다볼 수 있기도, 조심스레 도로 접어둘 수 있기도 한 조각의 구조를 통해, 그와 당신의 마음 사이의 거리를 차분히 조절해 나갈 수 있다. 이렇듯 연결과 해체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변형되는 관계 속에서 완전히 닫혀 있지도, 완전히 열려 있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미완의 이 몸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당신과 나처럼 살아 있다. 하나의 색과 또 하나의 색을 잇는 지퍼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그 사이를 드나드는 바람으로, 당신이 내뱉는 숨으로 이 찬란한 과정의 조각이, 우리가 우리가 되어가는 중인 연결의 가능 세계가 호흡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이 무렵 당신은, 시냇물 가운데 놓인 작은 징검다리처럼 동그랗게 모여있는 밤색의 덩어리들을 마주친다. 강 속의 돌이 흐르는 물에 부딪히고 깎여나가며 만들어내는 파동 소리를 담아낸 최청조의 류석음(流石音)이다. 바람을 가르며 이곳까지 걸어온 당신에게, 얼마간 이 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가기를 제안한다. 앉은 채로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면 희미한 진동으로 전해져오는, 물 같은 노은영과 돌 같은 이지숙이 만나 만들어낸 공명을 지금부터 함께 느껴보자.-
이지숙과 노은영의 ( ) : 연결의 시선 1
서울에 사는 이지숙과 광주에 사는 노은영은 이 전시를 준비하며 처음 만났다. 각자 몸 담고 있는 곳의 위치가 반도의 끝과 끝에 가까움에도 이들은 서로가 비슷한 것에 눈길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러한 유대감과 더불어 같은 대상에 대한 이들의 서로 다른 관점이 부딪혀 만들어낸 입체감 또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작업 기간 동안 지숙과 은영은 화면 너머로 서로의 시선을 공유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바람을 함께 맞고 있는 것처럼, 같은 것을 바라봄으로써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예컨대 은영이 무엇을 보아도 결국에는 그 안에서 사람을 보게 되는 작가라면 지숙의 작업에는 좀처럼 사람이 등장하지 않듯, 결코 동일한 존재일 수 없는 두 사람의 사이에는 수많은 미지의 틈이 존재했다. 연결과 간극의 사이를 무수히 횡단하는 과정을 통해 쌓아 올린 이지숙과 노은영의 <산. Mountain>은, 때로는 겹쳐지고 때로는 어긋나며 서로를 비추었던, 이들이 함께 나누었던 시선이 남긴 잔상들을 드러낸다. 그 시선들은 은영이 포착해 온,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순간들처럼 때로 어스름하고도 아름답게 중첩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초월적일 것 같지만 그 또한 완전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와의 연결감에 대한 지숙의 단상들과 같이,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별 사이를 메우고 있는 까마득한 어둠의 공간처럼 한없이 아득한 거리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동안 수차례 맞닥뜨렸던 이해와 불가해의 순간들을, 연결과 비연결의 감각들을 함께 담아내 보인다.
노은영의 ( ) : 연결의 시선 2
공간의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거대한 서가 앞에는 지난해 북경에서부터 이어져 온 노은영의 드로잉 신작들이 자리한다.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이 일상의 풍경들 속에는, 지금껏 그가 품어왔을 질문들과 감정들이 포개어져 잔잔히 흐르고 있다.
북경 레지던시에서 보냈던 시간 속에서 은영은 인류 역사의 반복에 대한 소회를 느끼며 삶을 구성하는 여러 관계와 경계들의 모호함을 깨우쳤고 그것이 그가 파스텔의 테두리를 문질러 사물들의 윤곽을 흐리게 만든 이유라고 했다. 이러한 색색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을 통해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려 하기보다는 자연 앞에 서 있을 때 생겨나는 질문의 상태를 그려내는 노은영의, ‘시선을 가진 몸’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눈을 깜빡이며 그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한 당신에게, 문득 그 뒤로 펼쳐져 있는 무수히 많은 책의 제목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품었던 물음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왔던 인류의 시간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당신과 작가의 살아있는 몸이 맞닿는 순간이다.
우리가 수억 광년 떨어진 시간 속에 속해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그릴 수 있듯, 이러한 노은영의 시선을 통해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맞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세계에는 있다는 것을,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크게 불어오는 내면의 바람 속에 한동안 잠겨 보기를 바란다.
제 3막 : 베이스폴리곤에서
사람들은 이제 밤으로 걸어 들어간다. 깊은 어둠 속에서, 미지의 소리가 불어온다.
이지숙의 ( ) : 연결의 소실
지하로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주변을 둘러싼 바람의 흐름이 묘하게 희미해지고 가늘어졌음을 감지한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나타난 풀숲 너머로, 근원을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오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향해 다가가서 그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다. 그러나 화면은 비슷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 허공을 만지듯 더듬 더듬 맴돌기만 할 뿐이다. 소리마저도 ‘들렸다’, ‘안들렸다’를 몇 차례 반복하다, 이내 짙은 어둠 너머로 사라지고 만다.
<굉음지하>는 작가가 수년간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궁금해했던 소리를 향해 어느 날 다가가 촬영을 하였는데, 다음날 그 뒤에 있던 오래된 가게가 정리되면서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일화가 담겨 있는 작업이다. “저는 종종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다가가거나 관계를 인식하는 순간, 되려 그 연결이 끊기는 경험을 한다”라고 말하며, 연결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상호 관계성에 대해 곱씹어보는 이지숙의 이야기에는 조금 전 우리가 지나온 ‘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 솟아오른 거대한 산을 어떤 벽과 같이 감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일까? 미로의 끝에 그가 준비한 마지막 장이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더 걸어가보자.
박희민의 ( ) : 연결의 기억
앞서 들려왔던 굉음의 파장이 여전히 미세하게 메아리치고 있는 작은 방 안을, 당신은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무언가에 불타버린 듯 검게 그을린 형상이 방 한켠에 홀로 자리 잡고 있다. 쉽게 훼손되고 부서지는 재료들로 구축되어 자신의 형태마저도 미약하게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검은 인간상은 흡사 태양 아래 노출된 뱀파이어가 햇빛 속에서 흩날리며 사라지는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이후 이 미로 같은 지하 공간 속을 조금 더 헤매다 보면 당신은 —마치 데자뷰 현상처럼 또다시 등장하는!—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두 개의 층계참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또 다른 검은 형상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고 소진된 모습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자리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연유를 궁금해하게 된다.
사실 무언가가 이미 휩쓸고 지나간 듯한 자리에 남아있는 박희민의 ‘홀’들은 단순히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허공에 붙들린 채로, 허공과 함께 있다. 허공의 ‘비어 있음’에 대한 인식은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그 자리가 채워져 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으로, 그러한 기억들이 세계와 이들을 미세하게 연결해주는 끈으로 작동한다. 박희민이 이 검은 ‘홀’들 중 가장 최근 빚어낸 형상에게 붙인 제목이 물 위에 둥둥 떠서 위치나 경계를 알려주는 표식인 <부표>이듯, 생生보다는 사死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요동치는 물결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나 그럼에도 결코 가라 앉지는 않는다.
한편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평상시에는 깊은 무의식 아래에 가라 앉아 있던 핵심 기억들은, 이따금씩 삶 속에서 무언가가 그것과 맞닿는 부분을 건드릴 때 천천히 물 위로 떠올라 또 하나의 부표처럼 일렁이고, 그로써 ‘홀’과 삶을 또 한 번 연결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기억과 우리의 몸이 서로 공생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예컨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트리거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윗 세대들의 기억인 대문자 역사는 ‘홀’들의 정체성의 기반을 지탱해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직접 그 일을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지금-여기에서 그 기억을 재생산할 수 있는 그의 몸을 빌어, 마치 빙글빙글 돌아가는 태엽 인형처럼 또다시 이 세계에 재소환됨으로써 잊히지 않고 전승될 수 있다. 그렇게 기억과 우리의 몸은 영영 가라앉아 버리지 않도록 서로를 묶어줌으로써 이 세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주수빈의 ( ) : 연결의 바람
당신은 이제 조금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앞서 지금-여기에서 ‘몸’을 가지고 존재하는 ‘홀’들이 대문자 역사의 기억을 이 세계에 재접속시키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고 술했듯, 끊임없이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하얀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당신은 이곳 광주의 봄으로부터 4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만나게 되는 기억들이 새 몸을 얻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광주와 뷔르츠부르크와 서울이라는 세 개의 도시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를 통해 서로 아스라이 떨어져 있는 세 시공간을 이어보고자 시도한 <風入目>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과 당시 외신 중 그 사건이 최초로 보도되었던 독일, 그리고 2026년 현재 서울에 몸을 두고 있는 작가 사이의 거리감과 연결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직접 겪지 않은 자는 무엇을 기억한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적비와 묘비석의 몸이 망자의 몸을 대신하는 5.18 민주 묘지의 아침,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과 광주천을 흐르는 물, 매일 오후 5시 18분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노래하는 민주 광장의 시계탑과 5.18 헬기 사격을 증거하는 전일 빌딩 기둥의 뒷면이 교차되며 일렁이는 필름의 건너편에는, 깊은 밤 속에서 그 묘비에 적힌 이름들을 아프게 읽어 내려가는 작가의 몸이 한강의 흐르는 물 앞에 서 있다. 방을 빠져 나오면 더 안쪽으로 통하는 통로에서부터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선율은, 5.18 당시 봉쇄된 광주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상을 담은 필름을 바깥으로 반출해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몸이 묻혀있는 독일에서 작가의 혈연에 의해 연주된 것으로, 이 세 작업을 매개하는 것은 ‘응시’라는 주수빈의 행위이다.
지구에서는 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달의 뒷면, 그러나 달이 반듯하게 공전하지 않기에 때로 흔들리며 드러나게 되는 9퍼센트의 뒷면처럼, 작가의 시선을 통해 번역되어 불완전하게 출현하는 그날의 시간들 속에서 80년 광주의 봄바람이 26년 서울과 독일의 봄을 향해 불어 가는 모습을, 당신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지켜본다.
광주光州라는 이 빛의 고을에서 1980년 5월에 일어났던 일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마치 태양을 맨눈으로 보는 일처럼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입힐 수도 있음을 예감하면서도 작가는 이렇듯 지난한 ‘-되기’의 시간을 이어 나가고, 그로써 재건축되는 새로운 기억의 몸을 빌려 그는 불가능해 보이던 연결을 향해 다가서게 된다. 죽음과 삶 사이의 행간에 서서, 모든 것을 이어주는 물과 바람 속에서 연결에 대해 사유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여기에 있다.
- 피아노 곡이 연주되고 있는 주수빈의 영상 작업 앞에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놓인 최청조의 <우림음(雨林音)>은 빗방울이 숲속으로 떨어지며 부딪혀 만들어내는 파동 소리를 담아낸 작업이다. 그처럼 태양에 의해 빛이 바랜 듯한 이 잿빛의 몸들은 파멸의 태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수빈의 목소리와 공명한다. 사락대며 그들의 테두리를 쓸어보면, 당신은 때로 음에 높낮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저물지 않는 태양에 불타버린 폐허의 자리를 복원해 나갈 수 있는 존재자들의 연대를, 연결의 바람을 노래한다. 함께 있다면, 빛이 바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 숨을 쉴 수 있다.-
노은영과 이지숙의 ( ) : 연결의 근원
이 지하 공간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이, 또다시 땅속에서 굉음이 들려온다. 당신은 끝내 그 소리의 정체를 향해 다가가 보기로 결정한다. 몸을 아래로 숙이고, 캄캄함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빛과 속도를 향해 위로 자라나는 도시와 달리, 아래로, 아래로 뻗어나가, “길을 이어주고 사람을 이어주고 세상을 이어주는 ‘터널’”이다. 터널 공사 현장의 지난한 과정을 담은 장면들이 산란하는 이지숙의 <굉음지하 2>는, 사방이 다 보이는 땅 위에서와는 달리 어둠에 잠겨있는 땅속에 통로를 내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그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아직 닿지 않은 근원의 세계’를 향해 다가가려는 바람으로 맺어진다.
다시 지상으로 눈을 돌린 당신은 이제, 돌탑을 쌓아 올리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작은 인간들의 희구 가운데에서, 인류의 첫 도구인 뗀석기의 형상을 띤 큼직한 돌탑 속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몸짓을 본다. 이 거대한 돌탑이 화면 안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존재자들을 그려낸 색을 모두 섞어 나이프로 쓸어내리는 방식으로 그려졌듯, 노은영의 <하나의 차원>은 이해와 연대의 감각이란—그가 이전에 <믿음의 동력>을 통해서도 논했던,— 인간 존재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라는 근원적 공통성에서부터 출발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지상에 이어 지하에서 또다시 맞닿게 된 은영과 지숙의 세계에는, 이렇듯 인류의 시원에서부터 모든 시간을 지켜봐 온 ‘돌’이라는 교집합이 있다. 화면 속에서 은영의 돌은 하늘을 향해 위로 쌓이고, 이지숙의 돌은 땅 아래에 묻혀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렇듯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을 향해 돌이킬 수 없이 달려 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지상에서 당신이 거쳐온 <산. Mountain>을 두고 이지숙은 문득, 광주에서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자신이 찍어둔 아름다운 버드나무의 모습과, 은영이 담았던, 버드나무에 한가득 붙어있다 떨어져 죽은 벌레들의 모습이 교차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어쩌면 바로 그 삶과 죽음에 대한 인류 공통의 감각이 그들의 공동 작업의 기반을 이루는 연결의 감각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회고한다.
이곳에 있는 두 작품은 공동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나, 이렇듯 지상에서 미처 못 다 쓴 그들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가 두 사람의 서로 겹치지 않는 시간대를 나란히 둔 이곳 지하의 끝자락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이 주는 신비가 있다. 그들 사이에 나타났던 거대한 ‘산’은 여기에 이르러, 더 이상 벽과 같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게 된다.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멈추지 않고 긴 여정을 함께 걸어온 이들이, 그것에 마침내 바람의 터널을 내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전효인과 박초연의 ( ) : 연결의 회복
당신은 드디어 이 기나긴 미로의 마지막 구간 앞에 서 있다.
이미지는 동일하나 서로 다른 시점에서 쓰여진 내러티브가 자막으로 흘러나오는 두 개의 영상, <도시를 앓는 두 가지 방법>이 통로의 양쪽 벽에 설치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이는 박초연과 전효인의 공동 작업으로, 그 안에는 이들이 이 전시장이 위치한 광주 양림동 주민들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된 거부의 순간들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사유하는 두 작가의 상이한 감각이 겹쳐져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끊임없이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들은 무수한 대문들을 마주하지만, 그 문 너머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 앞에서 효인은 몸살을, 초연은 희망을 앓는다.
그 자그마한 균열 속을 지나 통로의 끝에 선 당신 앞에, 더 큰 균열이 펼쳐진다. 세 갈래로 갈라진 갈림길이다. 당신은 세계와 개인,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자리한 미지의 어둠 사이에서 고민하다, 개인을 향해 먼저 다가가 본다. 척추에 스미는 차가운 떨림에 의해 열 몸살을 앓으며 분홍빛으로 뻗어나간 몸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져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환대를 기대했던 바람과는 달리 돌아오지 않는 응답을 기다리던 시간 안에서 경험한 단절감은 효인에게, 그의 ‘몸’이 겪는 사적 감각으로 신체화된다. 그러한 시린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뼈마디 사이 사이에 스며들고, 효인의 몸은 “그제서야 이곳에 닿”는다.
이번에는 세계를 향해 다가가 본다. 창백한 푸른 빛의 경계를 바라보고 서서 그것을 넘어도 괜찮을지를 고민하던 당신이 용기 내어 문턱 너머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작스레 따뜻한 주홍색 빛과 음성이 당신을 환대한다. 냉대라는 같은 상황에 대한 감각을 효인은 몸으로 내면화했다면, 초연은 바깥으로 뻗어나가 보기로 한다. 기꺼이 자신의 환대를 먼저 내어주기로 결심한 그의 시선 너머로, 당신은 우리 모두가 본래 태어난 곳이라는 ‘환대의 숲’, 초연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려내는 연결에 대한 희망의 세계를 엿본다.
하나의 통일된 사유로 수렴되는 결과물보다도 이러한 공동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꼭지는, 이것이 관계 안에서 서로 조금씩 어긋나며 반향을 일으키는, 각각의 차이를 담지한 협업의 참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맞닿고 연결될 수 있는지의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소리가 장애물에 부딪혀 되울리거나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움직임을 뜻하는, 초연과 효인의 반향은 바람이 생성되는 메커니즘과 닮아 있다. 초연의 외향과 효인의 내향이 만들어낸 반향의 바람을 지나 그들 사이에 자리한 미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 숨겨져 공명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벽을 마주했으나 그럼에도 때로는 이들과 양림동 주민들이 맞닿았던 짧지만 따뜻했던 순간들이다.
타자와의 연결에 대한 무너진 믿음은, 이렇듯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Echo : 바람을 향해서
이곳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는 수많은 생명력의 기운이 생동하는 공간이다. 아트폴리곤과 글라스폴리곤 공간은 채광이 매우 좋고, 통유리 너머로는 이곳 양림동에서 400년이 넘는 시간을 오래도록 지켜봐온 시 보호수 호랑가시나무와 건물보다도 키가 큰 흑호도 나무들이 내다보이며, 열려있는 문 사이로 바람이 드나든다. 반지하 공간인 베이스폴리곤을 거닐 때에도 두어 개의 방은 제법 큰 창을 끼고 있기에 그 틈새를 통해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전시와 활동들은 상당히 국제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공간의 정체성 중 가장 큰 것은 외부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근원적 조건은 닫힘이다. 땅과 집, 몸과 그 몸이 담지한 무게에 매여 존재하는 우리의 사유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안쪽으로 접히기 쉽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이 바람의 상상력이다. 그것은 공기의 움직임으로, 고정된 채 머물러 있는 대신 늘 움직이고 상승하면서 틈을 향하고, 이 존재와 저 존재의 사이를 매개하며 넘나드는 것이다.
고로 바람이 불 때 바람과 함께 오는 것들이 있다. 바람은 늘 타자들의 삶을 싣고 우리에게로 불어온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함께 있을 때, 숨을 내쉴 때, 우리는 우리의 몸 속에서 나온 바람들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공명을, 연결의 메아리를 듣는다.
미끄러짐 없이 타자에게 도착하기는 물론 어렵다. 눈을 깜빡일 때 빛과 어둠이 생성되듯, 우리는 타자 앞에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무수한 헤아림과 헤아릴 수 없음에 부딪힌다. 그러나 눈을 깜빡일 때 생겨나는 것은 빛과 어둠만이 아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도록 곰곰이 바라보며 눈을 깜빡일 때, 그 깜빡임 속에서 바람이 만들어진다. 어려운 연결을 향해 더디게 다가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호흡을 하고, 우리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바람들로 이루어진 연결의 온기가 폐허와 상실의 자리에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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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바람은 중의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신비로움이 있다. 바람이라는 단어는 ‘바라다’라는 소망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는, 인류를 서로 이어주는 언어의 신비로움이.
나는 말하고 또 말해도 여전히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다. 연결이란 지난한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전쟁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2026년의 지구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가졌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추구에 가깝다. 고로 이는 때로 sf 소설 속 비인간 존재자들 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태초부터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성’을 담지함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잃어가는 인간들과 달리, 그러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인간 존재자들은 불가해한 인간성을 향해 다가가고, 그것을 찾아가고, 그로써 결국 나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이 인간의 본질에 앞서듯, 그처럼 연결에 대한 바람을 품고서 이 공간을 횡단한 이번 여정의 끝에서 당신이 만나게 된 것도, 지난한 실존적 추구의 시간을 거쳐야만 획득될 수 있는 무언가이기를 바랐다.
이 자리에 모인 10인의 작가—김수민, 김유나, 김진선, 노은영, 박초연, 박희민, 이지숙, 전효인, 주수빈, 최청조—는 광주와 서울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한 시대를 함께 통과하고 있는 동시대인이기도 하다.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중력으로 붙들어주고 있기에 우리는 이렇듯 여전히 믿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이 바람 속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글은 전시를 준비하며 떠올린 스스로의 두 가지 물음—전시장 안에 모든 것을 연결하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연결의 바람으로, 저물지 않는 태양에 불타버린 폐허의 자리를 복원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쓰기이자, 이 전시에 함께해준, 기꺼이 연결되기를 택해준 작가들의 화답에 대한 메아리로서의 쓰기였다.
바람 한 점과 그림 한 점, 바람을 세는 단위와 예술 작품을 세는 단위의 소리가 같듯, 이곳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연결을 향해 나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결이란 단수의 참여자만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반드시 복수의 참여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람 속을 함께 걸어주는 당신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해준 당신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바람에 실어 보내며,
2026년 봄, 주수빈 드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람 속을 걸어가고 있다
앞서 걷는 이가 드리운 그림자가 태양을 가려주고
뒤통수를 보아주는 이가 있어 당신은 완전해진다
그의 존재가 당신의 뒷면을 담보하고
사람들은 멀리 멀리 나아가고 있다
지구는 둥그니 이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이어지게 될까
불가해와 불가능을 향해,
바람 속을 걷는 사람들.